"입 크게 벌려보세요. 몇 초면 됩니다. 아프게 피 안 뽑아도 되고 간단하죠?" 이기호 플레이트의원 원장은 김은수 군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유전자 검사에 대해 설명했다.
김군과 아버지는 '벤츠'와 '마티즈' 비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오른쪽)이 유전체 분석 검사에 대해 설명하며 김군의 입 안에서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지난달 28일 야구 명문인 휘문중학교의 유니폼을 입은 김은수 군(15)이 아버지와 함께 강남의 간판 없는 3층 건물을 찾았다.
3층은 병원, 1~2층은 검진과 연계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김군은 이 병원을 운영하는 이기호 원장과 면담하고, 유전체 분석 검사를 하기 위해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했다. 주의사항이나 검사 과정도 간단했다.
적어도 검사 30분 전에는 양치를 하고 음식이나 음료를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세포가 잘 떨어져 나오도록 볼 부분을 잠시 마사지한 뒤 큰 면봉으로 볼 안쪽 세포를 골고루 묻히면 된다.
유전체 분석 검사는 약간의 타액(침)이나 구강상피세포만 있어도 가능하며, 건강검진을 병행하는 병원에서는 주로 혈액검사를 활용한다.
처음 유전체 검사를 해본다는 김군과 아버지는 "너무 간단해서 신기하다"면서 "일주일이면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는데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각각 고유하게 타고난 유전체를 분석하는 유전자 검사가 건강검진과 만났다.
미래의학으로 각광받는 '예방의학과 맞춤치료'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서다. 인간은 A, G, C, T라는 네 가지 염기 30억개가 일정 순서로 늘어서면서 만들어졌다.
이 배열 순서는 전 세계 75억명 모두 다르다. 고작 네 종류 알파벳(염기)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키, 체형, 눈동자, 피부색, 머리카락 굵기 같은 외모가 달라지고, 신체능력은 물론 선천적으로 취약한 질병까지 어마어마한 차이가 만들어진다.
건강검진이 현재 내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라면 유전체 분석은 타고난 특성을 보여주는 그 사람의 'DNA 지도'다.
모든 사람의 DNA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기술은 있지만 아직 그 지도를 해석하는 방법은 채 2%도 밝혀지지 않았다.
전 세계 의료계는 물론 제약바이오 산업계가 유전체 분석의 미래에 주목하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변화보다 유전체 분석에서 파급될 영향력이 더 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원장은 이 같은 배경지식을 설명하며 김군에게 쉬운 비유를 들어 유전자 검사에 대해 알려줬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사고 날 확률이 있는데 그게 몇 %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운전 중에 스마트폰을 보면 사고 날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은 확실하죠.
스마트폰을 보는 모든 사람이 사고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통사고를 예방하려면 '스마트폰을 보지 말자'고 해야 해요. 유전자 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몇 %입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위험을 높이는 확실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보통 사람들에게 유전체 분석이 가장 널리 알려진 계기는 할리우드 배우 앤젤리나 졸리 때문이다.
졸리는 2013년 멀쩡한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했다고 밝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어머니가 10년 동안 유방암 투병을 하다 사망했는데, 졸리 역시 검사 결과 유방암 발병 가능성이 높은 브라카(BRCA1, 2)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예방적 차원에서 절제 수술을 택했다.
인종 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 중 0.5%가 브라카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다. 브라카1과 브라카2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으면 유전성 유방암 발생 확률은 최대 80%, 난소암 발생 확률은 최대 49% 증가하는 것으로 연구 결과 밝혀졌다.
이 원장은 "1000명 중 1명과 1000명 중 2명은 2배 차이다.
의사가 1000명 중에 2명이 걸린다고 말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데, 보통 사람보다 2배 높다고 말하면 엄청 놀란다"면서 "유전적으로 2배 정도 잘 걸린다고 하면, 환자들이 더 꼼꼼하게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하는 등 노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 어느 부분이 유전적으로 취약하다고 해도 '큰일 난다' '병 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예방 관리를 조금 더 잘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유전체 분석과 질병 간 연관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늘어날수록 의료 분야 외에 웰니스 관련 산업도 무궁무진하게 확장될 전망이다. 맞춤 식단 제안과 건강기능식품, 맞춤 화장품 등이 대표적이다. 이 병원은 1·2층 레스토랑과 연계해 관련 메뉴를 개발하고 개인별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 김은수 군이 이 레스토랑에서 개발한 메뉴들을 맛보고 있다. [이승환 기자]
"건강검진과 유전자 검사 후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관리법과 식습관 등을 권해드려요.
특히 김군 같은 운동선수들은 미네랄 호르몬 비타민 등의 밸런스가 잘 갖춰져야 하거든요. 뭔가 부족하면 채워넣어야 운동도 더 잘할 수 있잖아요.
비유하자면 마티즈를 벤츠로 바꿀 수는 없지만 마티즈가 어떤 엔진 문제가 있는지, 타이어가 닳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예방하기 위한 검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병원의 주요 고객은 중·장년층이다.
본인이 선천적으로 어떤 암에 취약한지, 현재 식단에서 영양소가 부족한지 등에 큰 관심을 보인다.
이 원장은 "열심히 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흡수를 못하면 더 챙겨 먹어야 하고,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몸에서 에너지로 잘 만들 수 있는지도 봐야 한다"며 "결과가 나오면 부족한 영양소에 맞는 음식을 권해 전인적인 건강 관리를 돕는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혈관을 자꾸 막히게 만드는 성분을 높아지게 하는 유전자를 타고났고 이 성분을 없애려면 엽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중됐다면, 이 지식을 의사 진료에 활용할 수 있다.
이 원장은 1층 레스토랑과 연계해 '당신은 엽산을 많이 드셔야 합니다' '미나리 신선초 양배추 등을 많이 드세요'라고 권고하고 식단에 넣어 평소에 많이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김군의 포지션은 외야수다.
아버지 김재우 씨는 "은수가 중3이라 고교 입시를 앞두고 체력을 키워야 할 중요한 시기인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힘들게 시간을 냈다"며 "유전자 검사는 저도 생소한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운동하느라 힘든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신경 쓸 것이 많다. 우리 아이도 키 때문에 조금 고민하는데,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그런 고민이 한두 가지쯤 있을 것"이라며 "그런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음식 처방 등이 나온다면 다들 신경 써서 식단을 지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김군은 "제가 건강한 편이라고 자부하는데 아주 힘들게 훈련했다 싶으면 다음날 하루이틀 몸살에 걸린다.
이런 부분을 보완할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 원장은 "유전자 검사 말고도 소변 검사, 아미노산 검사 등을 좀 더 봐야 할 것 같다.
아까 유전자 검사가 벤츠인지 마티즈인지 차종을 알아보는 검사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연비나 엔진오일을 검사하는 식의 또 다른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상담이 끝난 후 이 원장은 1~2층 레스토랑에서 개발한 메뉴를 맛보고 갈 것을 권했다.
이 병원은 김군이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도록 검사 결과에 따라 식단 등 맞춤 컨설팅을 해줄 예정이다.
김씨는 "처음에는 유전자 검사가 생소했는데, 원장님이 다른 야구선수들도 컨설팅해주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며 "분석 비용이 비싸면 부담이 되겠지만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하니 비용이 낮아진다면 부모 입장에서 한 번쯤 해줄 만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수천만 원이 소요되던 유전체 분석 비용은 눈부신 기술 발달로 향후 몇 년 안에 '100달러' 수준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유전자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평생 한 번만 검사하면 된다.
현재로서는 전체 유전체 정보가 있어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현재까지 유전자와 질병의 상관관계 등 밝혀진 것은 채 2%도 되지 않는다.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 개수도 제각각이다.
연구에 따라 3만4000개라는 주장과 의미 있는 정보가 담긴 유전자는 2만여 개라는 주장 등 다양하다. 유전자 기능이 밝혀진 것은 대략 1만2000개로 알려져 있는데, 새로운 연구 결과가 업데이트될수록 유전체 정보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전망이다.
신동직 메디젠휴먼케어 대표는 "은수군의 경우 비만, 강직성 척추염, 디스크, 류머티스 등 정형외과 항목들 위주로 검사를 진행했다"며 "사실 정말 도움이 되는 검사는 운동 후 회복, 부상 위험도 등과 관련된 유전자 검사인데,
현재 국내에서는 금지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운동 후 회복, 부상 위험도와 관련된 유전자 검사 상품을 중국 등에서 이미 서비스하고 있다.
유전체 분석기업 이원다이애그노믹스(EDGC)의 이민섭 대표는 지난달 19일 개최된 세계지식포럼 '100달러 지놈' 세션에서 유전체 지도를 내비게이션에 비유했다.
이 대표는 "유전체 지도는 미래에 어떤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지를 알려주고, 어떤 약을 썼을 때 효과적인지 알려주며, 운동을 해서 살을 뺄 수 있는 방법을 가이드해주고, 심지어는 저녁 메뉴와 와인까지도 추천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몇 년 새 대부분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것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유전체 정보를 스마트폰 안에 넣고 다니는 세상이 10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고도 했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교수는 "우리는 자신의 설계도인 DNA를 엿본 최초의 인류가 될 운명"이라며 "2011년 제가 유전자를 분석할 당시 2000만원이던 비용은 지금 40만원, 20분의 1로 낮아졌다.
CT나 MRI 촬영비용보다 싸졌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유전체 데이터를 갖게 될 때 어떤 세상이 열릴지, 정보 보안 등 명암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